장기호 전 이라크 대사의 바그다드800일]

“부임 첫날 밤부터 탕 탕 탕… 죽음이 바로 내 곁에 있었다”



이라크전이 터진 지 4년2개월, 이라크는 여전히 죽음의 땅입니다. 전쟁과 테러에 목숨을 앗긴 이라크인은 제대로 집계도 안 되고 있지만 민간인만 6만명 넘게 숨진 것으로 추산됩니다. 지난 4월 18일만 해도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의 시아파 거주 지역에서 4건의 차량폭탄 테러가 발생해 200여명이 사망했습니다. 지금도 바그다드에는 테러와 총격전이 없는 날이 단 하루도 없습니다. 매일 열 몇 명씩 테러에 희생됩니다.

장기호 씨는 이 사지(死地)에서 2004년 12월 20일부터 2007년 2월 28일까지 800일 동안 주(駐)이라크 한국대사를 지냈습니다. 장 대사가 이라크에 부임한 시기는 김선일씨가 테러단체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지 여섯 달 뒤였습니다. 자이툰 부대의 이라크 파병이 완료돼 한국도 테러 대상국에 올라 있던 때입니다. 장 대사가 바그다드에서 보낸 2년2개월8일은 이라크 정세가 가장 험악한 시기였습니다. 장 대사는 하루하루 긴장과 도전, 악몽 속에 바그다드에서 보고 겪은 일들을 9권의 비망록으로 작성했고, 이 비망록을 바탕으로 수기 ‘바그다드 800일’을 집필했습니다. 장 대사의 체험과 고뇌가 생생히 담겨 있는 수기를 Weekly Chosun이 입수해 독점 연재합니다. 장기호 전 대사는 5월 14일 정년퇴임을 앞두고 4월 25일자로 외교부에 사직원을 제출하였습니다.

지금 나는 정신적·육체적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인으로서 완전한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공관장 회의나 휴가로 한국에 나오면 다시 바그다드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옭아매곤 했다. 바그다드로 귀환할 때마다 마치 죽음과 공포가 혼재하는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나는 5월로 36년 외교관 생활을 접는다. 다시 바그다드로 돌아가야 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한없이 자유롭고 평화롭다. 62년 생애를 통틀어 지금처럼 여유의 기쁨을 값지게 누려보기는 처음이다.

2004년 12월 20일, 바그다드에 부임했다. 이라크는 2005년 1월 30일 과도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을 앞두고 있었다. 테러단체들은 선거를 막으려고 기를 썼다. 자이툰 부대 파병이 끝난 한국도 테러 대상국에 올라 있었다. 우리 국민이 2004 년 6월 가나무역 직원 김선일씨 피살사건의 충격에서 채 벗어나지 못하던 때였다.
나는 당초 1년만 근무하면 된다는 약속을 받고 부임했다. 그러나 이라크의 테러 사태가 점점 악화되면서 근무시한을 넘겨 꼬박 800일을 바그다드에서 일했다. 그 800일은 내내 긴장의 연속이었다. 내 자신과 생존의 문제를 돌아보고 체험한 기간이었다. 국가와 내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한 시기였다. 나는 이라크 근무를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것이 더없이 자랑스럽다.


자폭차량 대사관 500m 앞까지 돌진

지금도 바그다드의 첫날 밤을 생생히 기억한다. 귓전에 엄청난 폭음이 들렸다. 이어 먼 곳에서 “쿵쿵” 하는 폭음이 연이어 났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잠시, 꿈이었나 싶었다. 계속 폭음이 들렸고 가까운 곳에서 “탕탕탕” 하는 총소리도 울렸다.
그리곤 적막한 어둠의 고요가 엄습했다. 두려웠다. 머리맡 전등을 켰다. 시계는 새벽 5시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좁은 공간, 삐걱거리는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아, 그래, 여기가 바그다드였지. 꿈에서 깨어나듯 어제 요르단 암만을 떠나 바그다드에 도착한 일을 돌이켰다.



바그다드공항을 빠져 나오기 앞서 현지 경호원이 내 윗도리를 벗기더니 방탄복을 입혀 줬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길이라는 공항로(路)를 달려 시내로 오면서 이라크 부임 직전 읽었던 뉴욕타임스 기사가 생각났다. 바그다드 공항로가 대단히 위험해서 택시를 타려면 세계에서 가장 비싼 택시비 2500~3000달러를 지불해야 한다는 기사였다. 공항로 일부 구간은 중앙분리대에 대추야자수들이 무성해 거기에 매복한 테러리스트들에게 숱한 미군과 민간인이 희생됐다고 했다.

차창 밖을 살펴보니 중앙분리대는 물론 공항로 양 옆 야자수들도 잘려나가 있다. 테러범들이 아예 매복할 수 없게 해놓은 모양이다. 도처에 기관총을 내건 미군 지프와 탱크들이 보였다. 전쟁터에 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흥분되고 긴장돼 나도 모르게 자동차 안에 몸을 잔뜩 낮추었다.
바그다드 시내는 전쟁통에도 먹고살려고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로 몹시 복잡했다. 거리의 자동차들 중엔 쏘나타, 그랜저, 르망 등이 많이 보여 서울 어느 시장거리에 있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여러 검문소와 복잡한 거리를 지나 대사관에 무사히 도착했다. 한국 직원, 이라크인, 해병대 경비병들이 나의 부임을 환영했다. 이들을 보자 단숨에 긴장이 풀리면서 안도의 한숨이 터졌다.



“테러리스트 총에 맞아 죽는 꿈을 꿨어요” 직원들 악몽에 시달려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법은 매일 한 시간씩 하는 족구시합

3~4평 사무실 겸 침실서 생활

첫날 워낙 긴장했던 탓인지 곤히 잠들었다. 그리곤 폭음에 깨어난 것이다. 내가 누워 있던 방은 사무실 겸 침실이다. 다시 말해 공관 겸 관저다. 3~4평 되는 좁은 방을 책장으로 가르고 안쪽에 작은 침대를 놓았다. 반대편 공간엔 사무용 책상, 컴퓨터, TV, 소파, 대통령 사진, 태극기, 옷장 등이 있다. 12월 말이라 그런지 방안이 싸늘했다. 방 풍경이 그래서 더욱 을씨년스럽고 황량했다. 이곳이 내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공간이다.

‘아,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지난 시절 지냈던 제네바, 아일랜드, 캐나다 대사관저는 천국이다. 갑자기 정전이 되면서 칠흑 같은 어둠이 닥쳤다. 회중전등이 있을 테지만 찾기가 어려워 그냥 누워 있기로 했다. 어제 대사관에 도착한 뒤로만 전기가 10번 넘게 나갔다. 그럴 때마다 자체 발전기를 돌렸다.
이라크 정부는 국민들에게 전기를 하루 2~3시간밖에 공급하지 않는다. 그 나머지 시간은 발전기를 돌려야 하니 무리가 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고장이 잦은 발전기를 잘 유지하고 간수하는 업무가 테러리스트와의 싸움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다. 공관 예산 중 상당액이 발전기 관리에 들어간다.

나는 다시 잠이 들었다. 깨어 보니 7시 반이다. 세수를 하려고 화장실에 갔다. 대사 방엔 화장실이 하나 있다. 대사의 특권이다. 다른 직원들은 공동화장실을 써야 한다. 세수를 마치고 대사관에서 유일한 식당으로 갔다. 부엌에 긴 테이블을 놓아 만든 식당이다. 한국 국제협력단(KOICA)과 무역진흥공사(KOTRA)까지 포함한 대사관 모든 직원과 해병대 경비병들이 함께 쓰는 공동식당이다. 내가 앉은 자리 앞과 옆으로 K 공사, P 공사, K 무관(대령)이 앉았다. 아침으로 국물과 밥을 먹는 직원도 있지만 주로 빵과 치즈, 토마토, 오이, 올리브, 달걀, 커피가 나오는 양식이다. 식사 중간에 또 한 차례 폭음이 들렸고 이어 창문이 크게 흔들렸다. 폭음과 진동은 한 차례 더 반복됐다.

깜짝 놀라 이게 무슨 폭음인지 물었다. 새벽에도 여러 번 비슷한 폭음을 들었다는 얘기도 했다. K 공사가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방금 들린 폭음은 자살폭탄 차량이 터지는 소리입니다. 600~700m 밖에서 터진 것 같습니다. 오늘 새벽엔 박격포(RPG)가 그린존(Green Zone·국제지역)에 많이 떨어졌습니다. 자살폭탄 차량들은 주로 아침 8시 출근시간 때 복잡한 거리를 골라 돌진합니다. 요즘 들어 그 횟수가 늘어가고 있습니다. 내년 1월 민주화 총선이 가까워 오면서 테러리스트들의 방해 활동이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대사관, 해병대 등이 4개 초소 겹겹 경비… 하루 전기공급 2~3시간뿐
발전기 관리가 테러와의 싸움만큼 중요… 전 직원 식당·화장실 공동사용

대사관은 삼엄한 전시 요새

식사 후 직원회의를 소집했다. 먼저 부서별 주요 현안을 브리핑 받았다. 나는 전체회의에서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대사관과 직원, 교민 안전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대사관 안전을 위해서는 “대사관 직원 사이에 인화와 단결이 중요하며 이는 한국인 직원과 현지인 사이에도 똑같이 해당한다”고 강조했다. 누구 한 사람이라도 내부 동향을 외부에 유출시켜서는 안 되니 항상 가족처럼 긴밀한 유대를 유지해야 한다고 일렀다. 부임 초기에 나는 P 공사, K서기관, K 영사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나는 대사관 직원과 교민의 안전에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삶과 죽음이 바그다드 어디서든 동전의 양면처럼 교차하는 속에서 나는 늘 주님께 감사하며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지키려고 애썼다. 그런 노력에 동참해 준 대사관 직원들의 지혜와 용기, 그리고 동지애에 경의를 표한다. 아울러 이라크 대사관을 위해 관심을 갖고 지원해준 본부의 S 국장, M 국장, N 국장, 그리고 K 과장 등 간부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김선일씨 피살사건 이후 별다른 사건이 없었던 것도 바로 이들 덕분이다.

이라크 한국 대사관은 바그다드의 그린존 밖에 있다. 시아파 중에 부유층이 사는 자드리아 지역이다. 그린존 바깥 치고는 주택가 복판에 있어 안전하다. 박격포가 많이 떨어지는 그린존보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더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대사관은 입구부터 헤스코(Hesco) 방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샌드백(sand bag·모래주머니)을 쌓아놓고 이라크 경찰이 경비를 서는 4개 초소가 있다. 옥상엔 한국 해병대가 기관총을 걸어놓은 채 24시간 비상 감시근무를 선다. 그 모습 그대로 삼엄한 전시 요새다.

대사관 외곽 경비는 이라크 경찰이, 내부 경비는 한국 해병대가 맡는다. 대사관은 2000평 대지에 약 1000 평 규모의 2층 건물이 있고 작은 건물 세 채가 딸려 있다. 정원엔 80m 트랙과 배드민턴장, 철봉 같은 스포츠시설이 있다. 공관 뒷마당엔 족구장도 있다.
바빌론호텔이 있는 큰 길에서 대사관으로 들어오는 작은 길 입구엔 제1초소가 있다. 초소 옆 2층짜리 주택을 KOTRA가 사무실로 쓰고 있다. 대사관에서 40m쯤 떨어져 있다. 그 길을 따라 더 들어오면 제1초소를 지나 제3초소 앞서 KOICA 사무실이 있다. 역시 빌린 주택이다. KOTRA와 KOICA는 경비초소 보호 속에 있어 안전지대라고 할 수 있다. 집과 사무실이 대사관보다 시설이 좋아 우리는 ‘선진 KOICA’ ‘선진 KOTRA’라고 부르곤 했다. 잠자리와 근무 장소만 다를 뿐 대사관 직원과 똑같이 외교관 신분으로 활동하고 식사부터 대외 출입까지 모든 것을 함께 한다.



대사관 정문을 지나 담을 끼고 더 가면 제4초소가 있다. 1~4초소엔 꽤 많은 이라크 경찰이 교대로 근무한다. 대사나 직원이 나갈 때면 자동차 4대로 콘보이(convoy·호송) 대형을 짠다. 현지인 경호 병력의 보호를 받는 것이다. 자동차 행렬은 이라크 경찰차가 선도한다.
대사관은 상대적으로 외부에 덜 노출돼 있어 지금까지는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이 지역엔 시아파 부유층과 지도급 인사들이 많이 살고 있다.
사담 후세인이 몰락하고 시아파가 집권한 뒤로는 이 지역 치안도 불안해지고 있다. 바그다드 주재 외국공관들 중 파병국가 대사관(미국·영국·호주·폴란드·이탈리아·일본)은 모두 테러 공격을 받았다. 한국이 다음 차례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더욱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도 대사를 포함한 공관 직원은 바깥을 드나들 때 현지 경호원에 의존하고 있다. 나는 여러 차례 우리 군이나 경찰 경호관의 경호를 받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라크 경호원이 돈의 유혹을 받거나 또 다른 이유로 테러리스트들과 연결돼 있다면 공관원에 대한 납치와 테러가 손쉽게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외국 공관들은 이라크인의 경호를 가장 위험한 일로 간주하고 절대 맡기지 않는다.

대사관 내부 경호를 자이툰부대 소속 해병대원들이 하고 있어서 공관원 생활은 병영생활이나 다름없다. 모든 해병대원이 내게 “충성”이라는 구호를 붙인다. 가족을 동반하지 못하니 대사관은 남자만 사는 금녀(禁女)의 집이다. 식사도 단체로 식당에서 해결해야 한다. 대사라고 예외가 아니다. 어찌 보면 군대 사단장보다 사정이 나쁜 병영생활이 아닌가 싶었다.
바그다드 근무가 웬만큼 익숙해지자 아무리 큰 폭음이 들려 와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됐다. 2006년 1월 런던 테러로 35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세계 언론이 이를 크게 보도하는 것을 보면서 대사관 직원들은 “그 정도 희생을 갖고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나 자신도 깜짝 놀랐다. 얼마나 많은 죽음을 보았기에 나와 직원들 심성이 이렇게까지 둔감해졌을까. 작년 2월 시아파 황금돔사원 폭파사건 이후 시아파와
수니파 사이 보복 테러가 확산되면서 사망자가 더 늘어났다. 2006년 9월 이라크 보건부 통계로는 한 달 만에 266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군·경까지 포함하면 사망자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이곳의 하루는 언제나 생사 갈림길의 연속이다.

지금 다른 공관에 근무하고 있는 M 서기관이 당시 정무담당 서기관이었다. M 서기관은 치안과 정세 동향을 파악·보고하는 임무를 맡았다. 어느날 M 서기관이 자기가 꾸는 악몽을 고백했다. “꿈속에서 테러리스트들에게 납치돼 탈출하려고 애쓰다 결국 테러범 총에 맞아 죽는 악몽에 시달리곤 합니다. 어제 꿈에선 테러리스트가 쏜 총에 맞아 절벽에서 떨어졌습니다.”
나와 M 서기관은 그 날 다국적군(MNF) 사령부에 가서 사령관과 주요 군 간부들을 만나기로 일정이 잡혀 있었다. 그린존에서 헬기를 타고 다국적군 사령부가 있는 캠프 빅토리아로 가게 돼 있었다. 꿈 이야기가 마음에 걸렸다. M 서기관은 가지 않는 게 좋겠다 싶어 나를 수행하지 말고 남아 있게 했다. 공관원들은 테러 공포와 스트레스 때문에 잠자리가 편할 날이 드물다.

나는 악몽을 꾼 적은 없지만 자살폭탄 차량의 폭발음에 경악한 경험은 여러 번 있다. 2005년 11월 18일 금요일 오전 8시쯤. 금요일은 우리 대사관이 업무를 하지 않는 우리의 ‘일요일’이다. 침대에서 막 눈을 떴을 때였다. 마치 폭탄이 내 가슴에 떨어진 것 같은 폭발음이 들렸다. 이어 그보다 더 강력한 폭발음이 울렸다. 여자들의 비명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우리 대사관이 공격받아 포탄이 떨어진 것으로 생각했다. 곧 해병대원들이 “비상! 비상이다!”하고 외치며 뛰어가는 군화소리가 다급하게 들렸다.
나는 빨리 옷을 입고 나가려고 했지만 너무 놀란 나머지 당황해 옷을 빨리 입기가 어려웠다. 잠시 후 L 영사가 내 방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대사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500m 떨어진 곳에서 자살폭탄 차량 두 대가 연이어 폭발했습니다.”

방문을 열고 나가보니 대사관 입구 초소에 설치된 TV와 유리창이 모두 부서졌다. 대사관 내부 피해도 알아본 뒤 내 방으로 돌아왔다. 창문 커튼을 열어젖히자 유리조각이 우수수 떨어졌다. 커튼이 유리 파편들을 막아줬던 것이다. 커튼이 드리워 있지 않았다면 유리 파편은 내가 잠자고 있던 침대로 날아들었을 것이다. 500m 거리에서 터진 자살폭탄 차량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이때 뼈저리게 실감했다.



교민 안전에 최선 다한 직원들에 감사

바그다드의 공관 생활은 긴장과 스트레스의 연속이다. 이를 잘 관리해 나가는 것이 공관원에겐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나도 모르게 폭발음에 무감각해져 가고 있었다. 지난 3월 22일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바그다드의 그린존을 방문했을 때 말리키 수상과 회의 중에 50m 전방에 떨어진 박격포 폭음에 움찔하며 피하려는 모습이 보도됐다. 이것은 그야말로 자기방어 본능이다.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 오히려 미동도 없이 앉아 있던 이라크 인사들이 정상이 아니다. 말리키 수상을 비롯한 이라크 인사들은 폭발에 무감각해져 버린 것이다.
이라크 공관 직원들이 스트레스를 푸는 유일한 수단이 족구(足球)다. 족구는 공관원 화합·단결에 중요한 매개체였다. 나는 모든 직원이 족구에 참여하라고 독려했다. 저녁 식사 이후에는 매일 한 시간씩 족구를 했다. 외부 출입이 자유롭지 않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족구는 탈출구이자 청량제였다.

족구를 하다 보면 어떤 때는 서로 언성을 높여 다투기도 한다. 가벼운 부상을 입기도 한다. 하지만 족구장에서 벌어진 일은 족구장 안에서 다 해결하도록 했다. 어떤 때는 서로 상대방을 놀리기도 했다. 나도 “대사님 베이비, 베이비~” 하며 놀림을 받았다. 그러나 족구장에서 무슨 얘기를 하든 나는 개의치 않았다. 저마다 족구에 대한 집착이 강해서 충돌을 줄이려고 공관 직원과 머리를 맞대고 족구 룰을 만들었다. 그랬더니 룰을 둘러싼 시비가 많이 줄어들었다.

이라크에는 티그리스유프라테스, 두 강이 흐른다. 그래서 어느 테러단체는 자기네 이름을 ‘투 리버 클럽(Two Rivers Club)’이라고 짓기도 했다. 나는 나와 함께 바그다드 근무를 경험한 직원들의 모임을 ‘이강회(二江會)’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강회 회원의 자격요건 중 하나가 족구를 했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바그다드에서 족구는 테러 스트레스를 잊게 하고 인화와 단합을 꾀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


/ 글·사진=장기호 전 이라크 대사



장기호는 누구인가

김선일씨 피살 직후부터 올 2월까지 이라크 대사로 근무

장기호 전 이라크 대사는 정통 외교관 출신이다. 1945년 서울 태생인 그는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71년 외무고시에 합격했다. 1972년 외무부에 들어가 사우디아라비아, 태국, 캐나다, 미국, 제네바 등지에서 외교관으로 경력을 쌓았다. 제네바 차석대사, 아일랜드 대사, 캐나다 대사를 거쳤고 대변인, 통상국장, 외무부 기획관리실장을 지내기도 했다.

2004년 12월 20일 이라크 대사로 부임해 2007년 2월 28일까지 800일 동안 이라크 대사로 근무했다. 이라크 대사를 기피하는 시점에서 대사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그는 “800일 동안 아무런 사고 없이 무사히 대사직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대사관 전 직원의 지혜와 용기와 동지애에 가득 찬 희생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 조성관 차장대우 maple@chosun.com


이라크전쟁과 바그다드

시아파와 수니파 간 보복 공격으로 끝없는 전쟁 소용돌이에 휘말려

이라크의 바그다드는 ‘아라비안 나이트’로 불리는 아랍의 설화 천일야화(千一夜話)의 무대이다. 천일야화는 해피엔딩 스토리이지만 이라크전쟁은 이미 1000일을 훨씬 넘었는데도 끝이 보이지 않고 있다. 미군은 2003년 3월 20일 이라크를 공격, 파죽지세로 한 달여 만에 바그다드를 점령했다. 부시 미국 대통령은 같은 해 5월 1일 전투 종료를 선언했고, 같은 해 12월 14일 고향 티그리트의 한 농가 토굴에 숨어 있던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을 체포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미국은 이라크를 민주국가로 새롭게 만들기 위한 작업도 병행했다. 미군은 이를 위해 2003년 10월 25일 바그다드의 대통령궁과 컨벤션센터를 수용하고, 이 지역을 그린존(Green Zone)으로 명명했다. 이곳에는 연합군임시행정처(CPA)와 미군 사령부, 이라크 정부 청사와 총리 관저, 미국 대사관을 비롯한 각 국의 외교 공관 등이 자리잡고 있다. 콘크리트 장벽과 철조망이 쳐져 있고 24시간 중무장한 보초들이 경비를 서고 있는 이곳은 말 그대로 ‘철옹성’이다. 극장과 바, 인터넷 카페, 스포츠 시설 등 각종 편의시설까지 갖추고 있다. 또 이라크 내에서는 금지된 음주도 이곳에서는 할 수 있다. 미군들은 콘크리트 장벽 너머의 바그다드 시민들 거주지역을 ‘레드존(Red Zone)’이라고 부른다.

전쟁 초기 미군의 막강한 군사력에 숨을 죽였던 알 카에다와 수니파 무장단체 등 저항세력은 테러 공격과 게릴라전을 감행하면서 바그다드를 비롯한 이라크 전역을 혼란에 빠뜨렸다. 특히 알 자르카위가 이끄는 저항세력은 김선일씨를 비롯해 외국 민간인들을 무참히 참수하기도 했다. 중동 각 국 과격분자들이 이라크로 대거 몰려들었고, 이들 외국인 테러리스트들이 앞장서서 자살폭탄테러를 자행했다.

치안 상황이 나빠지면서 이라크를 재건하려던 미국의 계획도 지지부진했고, 애꿎은 민간인의 피해만 늘어났다. 바그다드 등 주요 도시에는 수도와 전기조차 제대로 들어오지 못했다. 또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에서 미군들이 수감자들에게 가혹행위를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라크 국민의 반미 감정도 고조됐다.

와중에 이라크는 2005년 12월 15일 총선을 실시했고, 새로 구성된 의회는 2006년 5월 20일 누리 알 말리키를 총리로 하는 새 정부를 출범시켰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권력다툼을 벌이던 수니파와 시아파 간 종파 및 정파 갈등은 더욱 증폭됐다. 특히 2006년 2월 22일 사마라에 있는 시아파 4대 사원 중 하나인 아스카리아 사원이 테러로 폭파되자 수니파와 시아파 과격파는 본격적으로 유혈충돌을 벌였다.

이라크전이 사실상 내전 상태에 빠지자 미국 내외의 비판 여론이 고조됐다. 2006년 11월 7일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에 패배한 부시 대통령은 지난 1월 10일 치안을 확보하기 위해 미군을 증파하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라크는 저항세력의 테러와 수니파와 시아파 간 보복공격으로 끝없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다. 승자는 없고 패자만 있는 이라크전쟁의 마침표를 언제쯤 찍을 수 있을까.

외교활동 언론 보도 후 테러표적 리스트에 올라

외출 땐 차량 4대 호위, 도심 한복판서 차량 틈에 끼자 경호원들 육탄 방어
미·영 이어‘파병 3위국’대우… 외교 절차에서 오찬 좌석까지 특별 대접
▲ 그린존으로 가는길. 대사 차량에서 본 경호 차량들

방탄복, 인내, 기도.
이 세 단어는 바그다드에서 외교활동을 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압축해 말해준다. 바그다드의 공관 직원은 외출할 때 누구나 예외없이 방탄복을 착용해야 한다. 두꺼운 철판이 들어간 방탄복을 입을 때마다 전투에 나서는 병사의 마음이 된다. 그런 비장함과 함께 자기도 모르게 무사 귀환을 기도하게 된다.


이라크에선 매일 130~150건씩 테러가 발생한다. 대부분 바그다드, 모술, 암바르(라마디), 디알라 등 4개 지역에 집중된다. 그 중에서도 바그다드의 테러가 가장 잦고 강력하다.
내가 이라크에 부임한 2004년 12월 당시 하루 평균 70건 넘는 테러사건이 터졌다. 2년 남짓 지난 지금은 130~ 150건으로 증가했다. 테러 내용도 변화했다. 테러리스트의 테러 활동도 늘었지만 시아파와 수니파 갈등에 따른 테러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하루 테러가 130~150건에 이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평화 속에 사는 한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바그다드에서 목격한다. 하루 평균 100여명이 살해되고, 티그리스 강변엔 수갑이 차인 채 머리에 총알이 관통한 시신들이 수십 구씩 버려진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치안이 불안한 지역의 주민들은 같은 종파 사람들이 사는 안전한 지역으로 이사 가거나 아니면 아예 해외로 이민 가는 사람이 늘고 있다. 이라크 보건부, 유엔, 언론의 통계가 제각기 다르지만 2003년 전쟁이 터진 뒤 주변국으로 빠져나간 이라크 이민자가 180만~20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2006년 2월 시아파 황금돔 사원 폭발사건 이후엔 매월 10만명이 이라크를 떠나고 있는 것으로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은 파악하고 있다.


▲ 사복을 입은 현지 경찰들이 대사 차량의 선도에서 경호를 하고 있는 모습.

바그다드 공항에서는 큰 가방 여러 개를 끌고 출국하는 이라크인을 많이 볼 수 있다. 미군 사망자가 개전 후 지금까지 3200명에 이르고 있고 이라크 민간인 사망자도 3만4452명이 라고 하지만 정확한 통계라고 할 수는 없다.

대사관 밖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상적인 외교활동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신변 안전에만 급급하느라 외교활동을 포기할 수도 없다. 미국 대사관을 비롯해 영국·호주·폴란드·이탈리아·루마니아·일본·러시아·독일·스페인·요르단·수단·오만·이집트까지 대부분 대사관과 외교관들이 테러 공격을 당해 일부가 납치되거나 살해됐다. 2003년 5월에서 12월까지 11건, 2004년 5건, 2005년 24건, 2006년에는 27건의 테러가 외교단을 겨냥해 발생했다. 공관들은 외부 출입을 긴급한 경우로만 극도로 제한했다.


대사 비서인 이라크인 살와(Salwa)씨는 행선지와 관련해 항상 세심한 조언을 해줬다. 어떤 때는 내게 단호하게 나가지 말라고 말리기도 했다. 그럴 때면 그의 조언을 받아들여 면담 일정을 취소하거나 조정했다. 살와씨의 성실한 업무 자세와 충성심은 지금 생각해도 고마울 따름이다. 이렇게 하다 보니 어떤 때는 업무가 밀려 일주일에 적어도 2~3번은 출입을 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나라 공관 사정도 비슷했다.


외출이 필요한 직원은 먼저 대사에게 행선지와 목적, 비상연락 방법을 보고한다. 그리고 보안담당관에게 미리 알려야 한다. 보안을 지키기 위해 이라크 현지인 경호원들에게는 당일 30분 전에 알리고 준비시킨다. 그러고도 방문지역 치안이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방문 시기를 재조정한다.

외출이 확정되면 경호원을 배치하고 4대의 차량을 호위대(convoy)로 편성한다. 이런 안전대책은 전 세계 공관 중에 바그다드에서만 이뤄지는 일이다. 차량 호위대도 방문지역과 현지 사정에 따라 형태가 달라진다.

▲ 2006년 5월 바그다드 시가지에서 발생한 차량폭탄 테러를 미군들이 조사하고 있다. (조선일보 DB)

경호 차량에 타고 외출했다가 경호원들이 도로에서 접근하는 차량에 총을 쏘며 쫓아버리는 광경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 2006년 9월 26일 이라크 석유부를 방문할 때 내가 탄 자동차가 도로 복판에서 여러 차량들 사이에 끼이게 됐다. 순간 경호원들이 차에서 내려 내가 탄 차를 둘러싸고 몸으로 방어했다. 차량이 옴짝달싹 못하는 상황에서 테러범이 공격해 오면 속수무책이다. 그래서 경호원들이 기겁을 하며 육탄 경호를 한 것이다. 그럴 때는 솔직히 자동차 안에 있는 나도 두려웠다. 나중에 들어 보니 경호원들도 공포에 질려 있었다고 했다.

석유부는 내가 이라크 대사로 일한 800일 동안 장관이 세 번이나 바뀌었다. 대사로서 신임 석유부 장관에게 인사를 안 갈 수도 없는 일 아닌가. 다른 나라 대사들이 석유문제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외교 활동을 펴는 상황에서 한국만 뒤질 수는 없었다.


나는 치안이 괜찮은 그린존 말고 다른 지역은 되도록 방문을 자제했다. 이라크 외교부는 그린존 밖에 있지만 그린존과 가까운 지역이어서 비교적 안전했다. 대통령, 총리, 부통령, 국회의장과 일부 부처 장관들만 그린존에 있었으므로 자연히 활동이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미국, 영국, 이탈리아, 호주, 캐나다 대사관은 그린존에 있는 반면 일본, 중국 등 대부분 공관들은 레드존에 있어 방문활동도 제한을 받는다. 이렇다 보니 대사관들이 개최하는 리셉션도 적고 또 개최한다 해도 치안을 이유로 참석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도 처음엔 몇 번 저녁행사에 참석했지만 그 뒤로는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몰라 저녁행사만은 출입을 삼갔다. 대통령이 초청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정중히 사양했다. 외국 대사관 방문활동은 주로 미국 사관에 집중했다. 미국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고 모든 정보를 갖고 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바그다드에 있는 동안 그린존에 있거나 그린존 가까이 있는 대통령과 부통령, 총리와 부총리, 외교부 장관, 국방부 장관, 기획부 장관, 통상장관, 주택건설부 장관을 주로 접촉했다. 석유부 장관은 그린존 밖에 멀리 떨어져 있어 위험했지만 예외적으로 자주 방문했다.


이들을 연쇄적으로 만나고 다니자 현지 언론이 자연스럽게 나를 비중 있게 다루기 시작했다. 나는 솔직히 보도가 부담스러웠다. 아니나 다를까 2006년 6월 이라크 외교부가 내게 전화를 걸어와 “내무부 정보국이 입수한 정보로는 일부 공관장을 겨냥한 테러가 있을 것 같으니 며칠 외출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나는 “한국이 직접 목표가 되고 있느냐”고 물었다. 외교부 측은 “나라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없었다”고 답했다.


그러나 집히는 데가 있었다. 외교부 전화를 받기 앞서 현지인 비서, 경호원, 경찰로부터 정보 보고를 받았다. 무장한 두 명이 차량을 타고 대사관 주변을 돌며 사진을 찍는 모습이 1·3·4초소에서 목격됐다. 우리는 이를 군 당국과 경찰에 신고했다. 나는 외교부 전화가 그 일과 무관하지 않다고 느꼈다. 약속이 잡혀 있던 하킴 당수, 자파리 전 총리에게 곧바로 양해를 구하고 면담을 취소했다. 내가 테러 목표가 됐다는 생각을 하니 오싹했다. 곧이어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그날 내내 소화가 잘 되지 않았다. 바그다드의 일상은 삶과 죽음이 뒤얽혀 움직인다. 만약 대사가 나가는 시간과 장소, 이동 경로에 대한 정보가 새 나가 테러리스트 수중에 들어가면 반드시 공격 당할 것이고 그러면 살아남기 어려운 일이다. 2006년 6월 25일 러시아 외교관 4명이 테러리스트에게 처형돼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코피 아난 당시 유엔 사무총장이 항의와 유감 성명을 낸 일이 있었다. 매복하고 있던 테러리스트 30 여명에게 이 러시아 대사관 직원들이 납치됐다는 얘기가 생각났다.


이런 상황에서도 한국 대사라는 사실이 가슴 뿌듯해지는 대접을 받을 때가 많았다. 우리나라가 동맹국 중 ‘제 3위 파병국’이라는 지위에서 오는 배려와 대우였다. 나는 2004년 12월 20일 부임 후 12월 30일 외무장관에게 신임장 사본을 냈고 사흘 뒤인 2005년 1월 2일 가지 야와르(Ghazi Yawar)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출했다. 나보다 3개월 앞서 2004년 9월 부임한 터키 대사가 나와 함께 신임장을 제정했다. 수니파인 가지 야와르 대통령이 내가 3위 파병국가의 대사라는 점을 감안해 서둘러 신임장을 접수했다는 뒷얘기가 있다.

야와르 대통령을 면담할 때도 차이가 났다. 터키 대사의 접견 시간은 15분쯤이었다. 대통령은 내게 30분을 내줬다. 대통령은 한국의 파병에 감사하다는 뜻과 함께 한국의 경제 발전을 이라


크의 모델로 생각한다며 양국 관계 증진에 노력하자고 강조했다.
나는 바그다드 시절 미국 대사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내가 부임했을 때는 네그로폰테가 미국 대사였다. 그는 내게 자이툰 부대의 재건지원사업을 높이 평가하며 매우 호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네그로폰테 대사는 자신이 주최한 외교단 오찬에서도 한국 대사인 나를 특별히 우대하곤 했다. 그는 나를 헤드 테이블에 앉게 했다. 헤드테이블 가운데는 네그로폰테 대사가 앉고 오른쪽에는 영국 대사, 왼쪽에는 한국 대사를 각각 앉혔다. 나머지 다른 나라 대사들은 알아서 자리에 앉게 했다.


네그로폰테 대사가 먼저 인사말과 함께 치안을 설명하고 난 뒤 영국 대사에게 발언 기회를 줬다. 영국 대사 다음에 내가 발언했다. 마침 자이툰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아르빌을 방문한 직후였기에 내가 느낀 치안 사정을 설명했다. 외교 관례로는 가장 늦게 부임한 대사인 내가 맨 마지막 자리에 앉아야 했다. 나를 헤드테이블의 3번째 자리에 앉히고 발언 기회도 3번째로 준 것은 미국 동맹국 중 제3위 파병국인 한국을 예우한 좋은 사례라고 생각한다.


2005년 가을이었다. 대사관에서 바그다드 대학 총장을 초청해 오찬을 가졌다. 그날 따라 날씨가 좋아 대사관 정원에서 양고기 바비큐를 들며 다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갑자기 엄청난 폭음이 들리고 곧이어 대사관 담장 위로 시꺼먼 연기 기둥이 솟아올랐다. 초청된 이라크인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오찬을 즐겼다. 나도 곧 평정을 되찾았다.

나는 오찬을 계속하면서도 한편으로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담장 바깥 테러로 고통받는 이라크 국민에게는 언제쯤 평화가 찾아올까. 그들은 언제쯤 밝은 웃음을 되찾을 수 있을까. ▒



/ 글·사진=장기호 전 이라크 대사

by carboots 2007. 5. 28. 13:52